현재의 상태를 다른 상태로 개선하는 체계적인 행위나 작용기제 그 자체
도덕은 생존메커니즘의 징후이다.
In 생각의 파편들 on 11월 8, 2008 at 1:22 오후니체의 글들을 보면(아직 그의 문장들을 그럴듯하게 읽어내지는 못하지만) 특정부분에서 도덕주의와 기독교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여기서 그는 도덕이란 자연을 왜곡하는 행위, 진리와 가장 멀리 있고, 온갖 몰락해야만 하는 자들을 내버려두자는 인류최대의 실수라고 한다. 그 당시의 시대정서로서는 파격적인 규정을 시도했다.
아! 물론 이것으로 소위 말하는 위버멘쉬를 거쳐 나치즘의 뿌리가 되었다고 한들, 설마 그가 게르만족의 그런 음울한 변태적인 행위를 정당화했을런지!
어쨌든 그는 도덕을 비판했다. 심지어 인간의 사랑이 비이기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두고 ‘끔찍하다’고 까지 말할 정도로. 그에 대해 겉핥기로 알고 있는 지금에서는 그의 말이 틀려보인다. 더욱 안을 파헤쳐들어가보면 무엇인가 손에 잡히는 것이 있을지 몰라도.
그러나 생의 활달함을 부정하는 ’도덕주의’가 인류에게 낳은 폐해는 그의 말대로 그렇다치고, 엄연히 타자와의 관계성에 초점을 두고 있는 ‘도덕’개념이라는 것을 무조건 ‘반자연’이라고 몰아세울수만은 없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그 ‘반자연’, 혹은 도덕개념이 사실은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문명화 된 생존전략일 가능성이 크다. 원래부터 개체적인 속성들을 지니고 태어난 인간이 그들의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특히 복잡하고 구조화된 문명 이후 타자의 암묵적인 공격성을 사전에 잠재우거나 그에 적응하기 위해 필요한 생존메커니즘이라면,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인간과 그의 본능 또한 자연의 일부이므로 이 역시 ’자연적’인 현상이 아닌가. 이에 대해서는 현대의 진화생물학자나 인류학자들에게는 이미 상투적인 논의이다.
도덕의 범주인 예의와 예절, 특히 봉건시대의 뉘앙스에 덧붙여져, 포크와 나이프로부터 출발된 서양식 예의와 매너가 어째서 필요했을까 생각해보는 것만으로 이 문제가 훨씬 명료해진다. 상대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는 극단적인 해석을 예외로 하고서라도 말이다.
차라리 모든 행동이 무언가 서양적이지 않으면 – 즉 ‘매너’스럽지 못하면, 촌스럽고 미개하다고 생각하는 빌딩 숲의 많은 사람들을 두고 샤르트르적 ‘구토’를 느끼겠다. (‘미개’하다니! 대체 누가 누구를 ‘개선’시킨단 말인가! 망할 정복주의적 발상!) 꼭 샤르트르가 아니더라도, 나로 말하자면 그런 부류들을 보면 정말로 구토증세가 난다. 토하고 싶다. 실제로 그렇다.
만약 그가 살아있었다면 답답한 마음에 당장 이런질문을 하고 싶다.
“프리드리히 니체, 그렇다면 당신이 원하는 것은 침팬지와 원숭이의 세계인가?”
도시의 야경
In 에세이 on 10월 14, 2008 at 10:46 오전도시의 야경이란 그야말로 인공의 경치 그 자체이지만, 멀리 떨어져 마치 나는 그곳과 관계없는 존재인 양
차분히 관조하고 있자면 도시의 복잡함 처럼 내가 그곳을 보며 느끼는 감정도 쉽사리 추상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도시는 의도에 따라 생겨난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의 야경은 오히려 불규칙과 우연이 짙게 공존하는 그림자로 점철되어 있다. 그래서 때에 따라서는 울적해 보이기도 하고 약간 우울에 보이기도 하지만, 다른 어느때는 이름모를 신비감이 풍겨지기도 하고 좀 더 경외롭기도 하다.
특히나, 바다와 섬이 시야와 맞닿는 것들의 배경을 장식하며 간간히 번쩍이는 등대의 처연한 분위기와 함께 빽빽한 선박들의 불빛이 기계적 활달함으로 내비쳐지는,
항구도시의 야경이란 더욱 더 변증적인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수많은 사람들의 인간사와 수많은 인공 피조물의 뒤섞임이 나열되고 점층된 그런 손때묻은 풍경이라 할지라도
어느덧 몰이해한 이의 거시적 시야 앞에서 그것들의 성김은 한 낱 예쁜 전깃불들의 거대한 집합이다.
어쩌면 도시의 야경이 아름다운 것은
우리 삶의 치부가 밤의 그윽한 어둠속에 막연히 침잠해있는 때문 일지도 모른다.
가을 깊은 밤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경외로운 저 구축된 숲을 보며 내가 잠시 움츠렸던 것은
늦은 밤 갑자기 불어온 쌀쌀한 가을바람으로부터의 비롯됨이 아닌
그 속에 어지럽게 흔들리는 나무들의 무게를 염두하였기 때문이다.
’05. 10. 14